주일 이야기/함께 나누는 말씀

광야의 잔치

Flowmgm 2026. 8. 2. 12:52

2026년 8월 2일 성령강림 후 열번째주일 성서일과 가해

맑은물교회 전체 예배-전관교회당

 

광야의 잔치

 

복음서 마태복음 14:13-21 (새번역)

13.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20.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열질환으로 12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번 여름 모두 건강하게 보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불볕 더위에 야외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수고에 감사하고 무탈하게 여름이 지나길 바래봅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늘 첫문장이 제일 어렵습니다. 설교문 대지를 잡고 서론의 내용과 첫 문장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을 보다 우연히 쇼츠를 접했는데 이 찬양이 딱 나오지 않겠습니까?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 모인 이곳에 주님 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 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알고 있는 찬양이었지만 딱 오늘의 본문을 노래하고 있는 찬양인줄은 몰랐습니다.
이 찬양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이 노랫말 때문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날이 저물 때는 우리 사람이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 쉴 때입니다.
그리고 빈들은 광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광야는 아무런 공급이 없고 사람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찬양의 노랫말은 바로 그 때와 그 장소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와 장소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붉은죽 사건 이후로 형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다가 빈들에서 밤에 잠을 청하다가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이어지는 꿈을 꾸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여전히 아합과 이세벨의 악한 통치가 무너지지 않고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광야로 도망합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청하는 그 자리에 날이 저물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를 어루만지고 음식으로 그의 육신의 몸을 돌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는 길에서 그리고 저물 때에 누군가가 자기들과 길동무하며 물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저녁에 여관에 머물러 음식을 나눌 때에 성경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나누어주신 것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고 발견합니다. 

날이 저물고 빈들에 있다는 것은 일에서 물러나는 시간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과 그 공간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성경에는 자주 해질 때, 밤 중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빈들에서 광야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전문맥 이야기

오늘 성서일과 마태복음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러면 우리가 던져야 되는 질문이 있죠? “어!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을까?” 성서일과를 따라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서일과가 성경 전체의 흐름을 따라 묵상할 수 있는 좋은 도구 이기도 하지만 모든 본문을 다 묵상 할 수 없습니다. 중간 중간 생략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14장의 앞부분이 빠진채 13절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렇게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하며 시작하는 본문을 만날 때는 앞부분의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문맥에서 들려지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의 죽음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알려드린 것입니다. 14장 1-2절을 살펴보면 헤롯이 세례요한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고, 지금 예수님의 사역 또한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권력자의 손에 의해 그것도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어처구니없는 계략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은 예수님에게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한 친척이었고, 함께 길을 예비한 동지였고, 어쩌면 예수님을 유일하게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애정과 사랑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피해서 외딴 곳(광야)로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헤롯의 폭력과 위협 앞에서 때를 기다리는 물러남이 필요했고,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혼자 계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수소문하며 예수님을 따라 쫓아왔습니다. 무리들이 참 눈치가 없죠? 이런 무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단어의 명사형은 ‘창자, 내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속이탄다 애가 끓는다는 표현을 쓰듯이 창자가 뒤틀리는 아픔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쉬고 싶고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무리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좇아 온 것을 보시고는 “이것들이 눈치도 없이 여기까지 따라오나?”하시며 귀찮아하거나 기다려라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슬픔을 다 정리하고 난 뒤에 무리들을 대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 계셨지만 무리들을 보셨고, 애도 가운데 계셨지만 무리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을 못 본 체하시지 않으십니다.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시고 아파하십니다. 저 멀리 우주에서 그냥 관찰자로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은 정서적 공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픈 곳을 고치셨던 것 처럼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에 구체적으로 일하십니다. 시편의 시인들이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한 뒤에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노래하듯이 하나님은 자기백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아파하시며 그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곳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의 문제와 어려움과 아픔을 가져갑시다. 하나님께서 공감하시며 일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든일을 겪을 때, 피곤하여 지칠 때, 내 정서와 나의 필요가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곁의 가족과 공동체의 식구와 이웃의 필요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준 긍휼과 자비의 행동이 우리 존재와 삶에 나타나길 바랍니다. 나를 넘어서 너의 얼굴이, 타자의 얼굴이 눈에 비춰지고 그 필요에 반응할 줄 아는 자리로 나아가는 맑은물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각기 사먹도록…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날도 저물었고, 빈 들이고(광야이고),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냅시다.
제가 제안이라고 표현했지만 제자들은 거의 명령조였습니다. 원문의 단어를 살피면 명령형이 쓰였습니다. 제자들도 지쳤을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문맥상에는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보내시고 다시 돌아와 보고하는 이야기가 이어져 있고, 이렇게 수고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제안하셨습니다.
외딴 곳(광야)로 가서 좀 쉬어라. 왜냐하면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도여행을 다녀왔고 피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서 끼니를 때울 틈조차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을 벗어나서 좀 쉴 수 있나 싶었는데 다시 사람들이 밀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 참 너무하네… 눈치가 없네…. 이제 좀 쉬나 싶었더니…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그만큼 힘드실텐데… 우리보고 쉬라고 하셔놓고 밀려드는 사람들을 계속 받으시고 고쳐주시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참다참다… 해가질 무렵에야 예수님께 퉁명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날이 저물었습니다(아마도 예수님은 밀려드는 병자들을 고치느라 해가 지는지도 몰랐을 것 같습니다). 이제 고마하지요. 우리도 지쳤습니다. 우리도 배고프다구요. 이 사람들 배고픈 건 모르겠고 돌려보내서 각자 배고픔은 각자가 알아서 사먹으라고 해야됩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살펴본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제자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배는 고프고(배고프면 더 화가 잘나고 짜증이 납니다^^), 감정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바로 매일 마주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숨겨두고 아주 합리적인 언어로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아니 명령합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예수님! 우리 지쳤습니다.).
사람들을 흩어보냅시다(이제 그만합니다. 무리들은 돌보시면서 우리의 지침은 안보입니까?).
각자의 배고픔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합시다(설마 예수님이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지는 않겠지요? 우리에게는 그럴 책임도 의무도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제자들의 제안은 아주 합리적이고 정직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중에 누군가가 “우리가 빵 이백데나리온 어치를 사와서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는 대화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계산도 빨랐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도, 그럴만한 책임도, 그럴만한 여유도,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핍의 시기, 어려운 시기를 마주하면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거나 이웃의 필요를 돌볼 여유와 이유를 잊어버립니다. 내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공동체와 이웃과 세상의 결핍과 아픔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하며 항변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이 할 일이 아님을 경계를 짓습니다. 필요를 안고 찾아오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서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내 책임과 내 의무는 여기까지라고 한계를 짓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정직한 이유를 대면서 여기까지만 선을 긋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산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우리는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시장의 논리를 선택하고 그에 따라 삽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의 반응을 잃어버립니다.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체념합니다. 


너희가 주어라…

“돌려보내서 각자 알아서 끼니를 해결하도록 합시다”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눈치도 없이 전혀 생뚱맞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헐~~~
와~! 예수님! 너무하네요. 이건 너무한거 아닙니까? 우리 할만큼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애쓰고 힘들고 배고픈거는 안보입니까? 우리더러 저들을 먹이라니요!!! 우리에게 그럴만한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라는 항변이 터져나올만도 합니다. 

제자들의 시장의 언어, 각자도생의 언어에 예수님은 도전하십니다. 아니다. 흩어 보내지 말아라. 그들의 필요를 마주해라. 무리들의 배고픔의 얼굴을 마주하고 너희가 그 필요를 채우도록 하여라며 무리들의 얼굴을 피하려던 제자들을 무리들 앞에 세우십니다. 

우리말로 “너희가 주어라” 번역된 문장을 살펴보면 헬라어 동사 어미에 인칭이 들어 있어서 굳이 주어에 해당하는 너희라는 대명사를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을 덧붙이자면 “너희가 주어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가”가 됩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큰 그림이 있으셨을까요? 오병이어의 큰 기적에 제자들을 동참시키십니다. 출애굽의 때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손을 펼쳐 보십시오! 하며 오른 손에는 빵을 왼손에는 물고기를 만들어내며 기적을 베푸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굳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참시키시고 그들의 손을 통해 무리들을 먹이십니다. 

“너희가 주어라!”는 황당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명령은 무리들을 향해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병을 고치고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예수님의 일에 제자들도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초대였습니다. “너희들도 지치고 힘들고 배고프지? 안다! 그러나 이들도 똑같다! 아니 더 힘들다. 더 주리고 배고프다. 너희들의 필요에만 매몰되지 말고 이들의 필요와 고통과 아픔도 함께 마주하길 바란다. 너희가 내 제자로 소중하고 귀하다. 또한 지금 여기 있는 이들도 소중하고 귀하다. 각자도생의 언어, 시장의 언어로 너희가 살아가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나와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고 배우길 바란다. 너희 안에 있는 한계에 갇히지 말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나라의 충만을 경험하고 누리길 바란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초대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각자 도생의 이야기, 시장의 언어, 타자의 필요보다는 나의 필요에 익숙한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이야기, 관대함과 긍휼의 언어, 나를 넘어서 타자의 필요에 반응하는 자리로 초대합니다. 

때론 하나님은 우리를 한계 상황까지 몰고 가십니다. 주님 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하는 순간에 아니 한 걸음 더 들어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주님 나도 힘들어요! 하는데 안다 그런데 조금 더 해보자!라고 제안하십니다.
우리도 각자 도생의 세상에서 그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합리성과 경제성의 논리에 갇혀 시장의 언어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나의 필요에는 본능적이지만 타자의 필요에 반응하기란 온 몸을 비틀어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에 더 젖어들길 바라십니다. 관대하신 하나님을 닮고, 자비하고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를 닮아가길 원하십니다. 타자의 필요에 반응하고 채움을 통해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려가길 바라십니다. 

오늘 나의 삶에, 우리 맑은물 교회에 “너희가 주어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시간, 공간은 어디일까요? 날이 저물고, 빈들이라는 광야에 서는 순간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 시간은 어디이고 언제일까요? “너희가 주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 공명되어 울리길 바랍니다. 


~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을 가져와라.

너희가 주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제자들은 다시 현실적인 답변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가진게 여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빵 5개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 밖에 없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이것 밖에 없음’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이것으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없는 것, 한계 상황인 것에서 더 쥐어 짜내어서 무리들의 배를 채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빵을 더 만들어오고 물고기를 더 잡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있는 것 안에서, 지금의 가진 것에서 출발해서 무리의 배를 채우라는 초대였습니다. 무리들의 배를 채우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있는 것을 예수님께 가져가서 예수님께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참시키고 있습니다.
무리의 배고픔을 애써보지 않으려 했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시며 무리의 배고픔을 보도록 하십니다.
지금 가진 것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이야기에 밖에 없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내어준 그것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축복기도 후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의 손을 통해 실제로 성인남자만 오천명의 무리들을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굳이 제자들의 손을 통해 무리들을 먹이십니다.
“너희가 주어라”는 예수님의 제안 안에는 이런 큰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이야기 안에 젖어들기를, 관대하신 하나님아버지의 풍성함을 누리고 경험하기를, 하나님의 세계에 모자람이 없음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한계, 나의 결핍, 내 필요 안에 갇히지 말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풍요 안에서 이웃을 공동체를 세상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 손에 들린 것이 ~밖에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려질 때 하나님의 잔치를 시작하는 출발이 됩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작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풍요로움으로 잔치로 변합니다. 우리가 앞서 찬양하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손에 들린 ~밖에 없는 것을 드릴 때 주께서 일하십니다. 풍요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어드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잔치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아주 오래된 찬양이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 차네~

지금 내가 가진 ~밖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요? 돈일 수 있고, 시간일 수 있고, 에너지 일 수 있고, 재능 일 수도있고, 그 무엇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밖에 없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알고 하나님나라의 풍요를 경험하길 바라십니다. 내 손에 들린 그것을 우리 주님께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잔치

오병이어의 기적이 앞선 문맥에서도 잔치가 열립니다. 궁정에서 열린 헤롯의 생일 잔치입니다. 자기들만을 위한 경계를 짓고 권력을 탐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이들의 잔치입니다. 그 잔치는 피를 부르고 폭력이 난무하고 쟁반위에 사람의 머리가 올라가는 끔찍한 잔치였습니다. 

그러나 해도 저물고 외딴 곳(광야)에서 뜻 밖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자들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광야의 잔치가 열립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앉히십니다. 여기 앉히다로 쓰인 단어가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나오는 자세의 앉음입니다. 간단한 식사 자리나 급히 먹는 앉음의 자세가 아니라 느긋하게 연회를 즐기는 자세의 앉음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밖에 없다고 했던 바로 그것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정확하게 두번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를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십니다. 

어느시점부터 인지는 모르나 물고기 두마리와 빵 다섯덩이는 떼어져서 제자들의 손에 그리고 제자들의 손에서 다시 무리들에게로 끊임없이 끊임없이 떼어져서 무리들을 먹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 

광야에서 잔치가 열리고 그들은 배가 부르도록 먹고, 그리고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정도로 남았다고 기록합니다. 

광야에서 열린 잔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헌신을 많이하고 많이하지 않고, 자격 여부를 따지지 않는 거기에 있는 모두에게 열린 잔치입니다. 

광야에서 열린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 남았습니다. 

광야에서 열린 잔치에 기쁨과 놀라움과 경외가 가득찼습니다. 이 일을 경험했던 제자들의 얼굴, 무리의 얼굴을 상상해봅시다. 굶주림 끝에 배부르도록 채우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모두가 기쁨과 놀라움과 경외가 가득찼을 것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우리의 삶에도 펼쳐지길 바랍니다.
밖에 없는 그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잔치를 우리의 가정교회에서 우리 맑은물교회에서 경험하고 나누어지길 소망합니다. 


여기 들어서, 축복하고, 떼어서, 나누어주는 네가지 모습은 이후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찬의 행위로 발달합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를 만나서도 그 식탁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 마다 오병이어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모두 함께 이 광야의 잔치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세상을 위해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이 되어 이 세상이 먹고 마실 양식이 됩니다. 

성찬은 광야의 잔치를 경험하고 반복하는 자리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 손에 있는 그것을 가져오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의 삶에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잔치가 열리는 때입니다. 빈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잔치가 열리는 자리입니다. 떼어진 것이 남습니다. 나누어진 것이 넘칩니다. 우리 손에 들린 작은 것을 들고 주님의 식탁으로 가져갑시다. 우리의 존재와 삶이, 우리가 속한 가정교회가, 우리 맑은물교회가 누군가의 식탁이 되어지고 잔치가 되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주일 이야기 > 함께 나누는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삭줍기와 부스러기  (0) 2026.08.17
내다  (0) 2026.08.08
샛별목장 7/26 말씀나눔  (0) 2026.07.25
샛별목장 7/12 말씀 나눔  (0) 2026.07.25
천국은 마치...  (0) 2026.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