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이야기/함께 나누는 말씀

내다

Flowmgm 2026. 8. 8. 23:12

2026년 8월 9일 성령강림 후 열한번째주일 성서일과 가해

가정교회 예배 말씀

 

내다

 

복음서 마태복음 14:22-33 (새번역)

  1.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3.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4.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5.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6.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7.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8.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9.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10.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11.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12.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사

성령강림 후 열한번째주일을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함께 모인 이자리 가정교회 가운데 이미 현존해 계심을 떠올리며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가정교회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입추가 지났습니다. 하지만 무더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우스개소리로 입추를 가지고 이행시를 했더군요.
입착쳐! 추워지려면 멀었으니까! 네 많이 덥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지나 가을이 오겠지요! 가을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더위에 힘든 이웃들을 생각하며 작은 물한잔이라도 건넬 수 있는 마음의 시원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내다.

한 밤중에 무서운 꿈을 꾼 아이가 울면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엄마든 아빠든 달려가서 아이를 안고서 다독입니다. ‘엄마 여기있다. 아빠 여기있다.’ 아무리 무서운 꿈을 꾼 아이라도 곁에 함께 하고 있는 엄마의 존재와 아빠의 존재로 인해 다시 안심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밤이 새도록 풍랑으로 인해 고생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바다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안심해라. 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제자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 바다는 잠잠하게 되었고, 다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동행을 계속하게 됩니다. 

때로 삶에서 폭풍우를 만납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제자리 걸음만 되풀이하는 것 같고, 공동체를 위해 애쓰고 노력했지만 관계는 더 꼬이고, 혼자인 것 같고 외로워지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런 시간, 그런 자리에 “안심해라, 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하게 상황이 정리되지는 않지만 다시 한걸음, 오늘을 살아낼 용기와 힘이 우리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성서일과 서신서의 말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로마서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길 바랍니다. 

 


왜 풍랑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재촉해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건너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에 태워서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고 무리를 흩어서 돌려보내신 이유는 요한복음에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을 예수님을 억지로 왕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열광하며 “예! 수! 님!”, “예! 수! 님!”하며 왕으로 삼으려 했기에 제자들도 군중에 동요되어서 흥분하고 휩쓸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따로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리둥절하며 정신없이 배에 올라 반대편으로 노를 저어서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해서 갔고,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가라고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냥 풍랑이 아니라 아주 고약한 풍랑을 맞았고, 밤이 새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오늘본문을 유추해보면 벳새다쪽에서 게네사렛으로 이동을 한 것처럼보이고 직선거리가 약 8-10km가량 됩니다. 적어도 세시간이면 충분히 건너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저녁즈음 오병이어의 이적이 일어났고, 군중들이 열광하자 예수님께서 급히 제자들을 보내고 무리들을 흩으신 것을 보면 늦어도 9시가 되기 전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향했을 것 같습니다. 새벽이 다되어서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것을 보면 제자들은 3시간이면 건너갈 거리를 반정도 밖에 가지 못했고, 거기다가 거의 7-8시간을 풍랑으로 인해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시달리다’라는 동사는 고문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마태는 중풍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의 괴로움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서 배에 올랐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풍랑을 만나고 한밤중에 오고가도 못하는 풍랑을 이겨보려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 상황을 만납니다. 풍랑을 만난 것은 제자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거의 예수님의 압박이나 강제에 의해 배에 오르고 건너편으로 갔기 때문에 제자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납니다. 갈릴리에는 지형상 자주 이런 풍랑이 일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어려움과 괴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피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순종하면 형통하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고요. 그래서 가끔씩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내 기도와 정성이 부족했나?’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씩 맞을 때도 있습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씩은 맞으니깐요. 때로는 죄로 인한 형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인생이 마주하는 삶의 질곡일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인생이 겪는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는다고 피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보내신 길에도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에도, 때로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걸었음에도 어려움이 닥치고 일이 안풀릴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먼 길을 떠나 가나안에 왔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이방인의 삶이고 그에게 찾아온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먹고살길이 막막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좋은 태도이나 자책하거나 이상히 여기지 맙시다. 인생을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이 찾아 온 것을 알고 잘 견디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 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홀로 거기에 계셨다.

저에게는 이 장면이 제일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가장 부족하고 필요한 모습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친척이요 동지요 마음을 나눈 세례요한이 권력자의 손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고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무리들이 동요하고 제자들 또한 흥분하고 휩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흩으시고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머무는 시간을 가지십니다.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과 거리를 두고 물러서서 홀로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이야기에 물러서서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종종 등장합니다. 사역의 초기에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이른 아침에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만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홀로 남아 산에 올라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삶의 중요한 고비와 결정의 순간에 물러나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도 홀로 물러나 기도하시는 삶의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어쩌면 홀로 물러나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방향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유혹의 순간, 갈등의 순간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이지 않았을까요?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하지만 잘 실천하지 못하는 한 가지를 꼽으라면 물러나 홀로 기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분주한 삶에 쫓기고 순간순간 처리해야하는 일에 휘둘리다보면 우리는 방향을 잃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삶의 이유와 정말로 해야하는 일을 놓칩니다. 하루 중에 일정한 시간 고요히 하나님의 현존 앞에 머무는 삶의 습관은 분주한 일상에서 삶의 방향을 잡아줍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나 갈등의 순간에 세상의 요구나 나의 욕망에 이끌리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거나 선택의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삶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오늘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한가지를 꼽으라면 어쩌면 예수님처럼 물러나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 아닐까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저와 맑은물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다 위로 걸어서

풍랑을 만나 생고생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움직이십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제자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십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다른 본문 마가복음에는 사투를 벌이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힘겹게 버티는 제자들을 보시고서 그들에게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가셨습니다. 산에서 보시고 멀찍이서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유령이다”라고 외칩니다. 전혀 예수님일거라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이 바다위를 밟고 걸으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욥기 9:8에서는 “마치 단단한 땅 위를 걷듯 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시편 77: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발자국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하박국 3:15에는 “주께서 주의 말들을 타고 바다를 밟으셨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구약에서 바다 위를 밟고 서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발현입니다. 

제자들은 바람이 멎고 풍랑이 잦아든 이유도 있었지만 배에 오르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이 마태복음에서는 처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도 풍랑을 만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이 피곤하셔서 배의 뒷부분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이 고생하다가 예수님 도와주세요한 뒤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 후에 마태는 제자들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라며 예수님에 대한 놀라움을 의문으로 표현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6장에 이르러서 어떤 기적이 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에서(로마의 통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바람으로 인해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유령이다라고 외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안심해라. 내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다”라고 한 표현의 원문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에고 에이미는 흔히 나다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70인역에(구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서 하나님의 자기선언의 정형적인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시고, 에고 에이미 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시고, 바람을 잠잠케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바람을 맞아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전혀 상상도 못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발견하게 됩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에고 에이미 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시고, 바람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인생의 풍랑이 없으면 좋겠지만 때론 그 풍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와 시간이 됩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겪으며 풍랑 가운데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 앞에 엎드려 고백하고 예배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움을 만나고 그 어려움 가운데로 찾아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들이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잘 느끼지 못했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자리가 됩니다.  때론 인생의 어려움이 예수님을 만나는 배경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오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처음에는 유령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구약본문에서도 엘리야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 계시지 않고 가늘고 조용한 소리 뒤에 오셨습니다. 엘리야기 기대하고 바랬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호렙에서는 침묵을 뚫고 찾아오셨고, 갈릴리에서는 폭풍을 밟고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바램과 달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며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기대와 바램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뜻밖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건 아닌지 모릅니다. 지난 한주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셨을까요?오늘 이 가정교회 모임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은 어떤 음성으로 어떤 모습으로 함께하고 계실까요? 우리의 삶의 자리에 늘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깨닫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맑은물에서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자신을 나타나시고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제자들의 걸음과 같이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하며 궁금증을 가지다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함께 예수님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길동무가 되는 날이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아! 베드로!

베드로 이야기를 빼먹을 수 없지요! 본문에서 나타나는 모습으로는 베드로의 실수, 실패담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베드로의 도전기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드로만이 물위를 걸었던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으니깐요. 

안심해라. 내다.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대뜸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정말 주님이시라면 나로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해주십시오”

우와! 정말! 놀라운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저 같이 수줍음이 많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반응입니다. 정말 베드로스럽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신도 걷고 싶어졌을까요? 스승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제자인 자신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밤새 노를 젓느라 고생했지만 제자리 걸음을 하던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걸으면 되는 거였습니까?”하며 허탈해졌을까요? 배에서 이제 그만 내리고 싶어졌을까요?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스럽게 정말로 예수님임을 확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가짜는, 유령은 “이리 오너라”하며 베드로도 물위를 걷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청에는 예수님인지 정말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싶은 마음보다도 주님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나로 물위를 걷게 해달라는 요청은 바로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나로 물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 더 큰 마음이었습니다.  아니라 물 위를 걸어 보겠다는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발걸음을 떼어 보겠다는 예수님을 향하는 믿음의 도전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물 위를 걷게 한 것은 그의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오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순간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고, 비록 자신의 요청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물 위로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베드로의 도전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마도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보면서 다른 제자들이 마음 속으로 나도 도전해 볼껄.. 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좋았는데…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고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서,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폭풍 가운데 예수님만 보였던 그가 그래서 물 위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던 베드로가 다시 폭풍이 눈에 들어옵니다. 풍랑이 없다가 갑자기 다시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풍랑으로 고생했습니다. 계속 풍랑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향해 갔습니다. 풍랑은 배에서 내리기 전에도 그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풍랑이 온 시야를 덮어버립니다. 달라진 것은 풍랑이 아니라 그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상황이 우리를 불신앙이나 두려움으로 몰아 넣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시선을 돌릴 때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움과 갈등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크게 보일 때,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신경쓰일 때, 하나님보다 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고, 돈의 힘 앞에 어쩔 줄 몰라하게 됩니다. 

물에 빠져드는 베드로는 즉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안타깝지만 그렇지만 베드로는 다시 시선을 예수님께로 향하고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살려주세요. 가장 간결하고 정직한 기도입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올리십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며 그를 다독이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너! 왜 그렇게 못났니?”하며 질책하는 말이 아니라, 넘어진 아기를 향해 일으켜 세우며 “아이고, 우리 아기! 조심하지 그랬어!”하는 걱정하는 목소리입니다. 여기서 순서도 중요하지요! 물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향해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하고서 한참 허우적 거리게 놔두고 건져주신게 아닙니다. 어쩌면 거리가 좀 있었기에 즉시 달려가서 베드로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난 뒤에 손을 잡고 똑 바로 서 있는 상황에서 눈을 보시며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찾아서 물위로 걸어오시는 분이시고, 물에 빠져들어가는 베드로를 즉시 손을 내밀어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온 몸으로 경험합니다. 그를 향해 “오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의 귀에 울립니다. 오너라는 말씀에 첫 발을 물 위에 옮겨 놓고 몇발 내디디며 물 위를 걷는 발의 감촉을 느낍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흔들리고 온 몸이 물에 빠져 들어가며 살려달라는 요청에 즉각 반응하시며 손을 뻗어 그를 건져올리는 예수님의 손의 감촉이 그의 손에 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는 예수님의 걱정어린 음성이 그의 인생에서 흔들리는 순간마다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르며 바람이 그치는 신기한 변화의 순간도 맞이합니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온몸으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그의 고백도, 예수님을 잡으러 온 종의 귀를 잘랐던 사건도, 세번이나 부인하며 펑펑 울었던 그날 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갈릴리 바다에서 옷을 벗고 있다가 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 들었던 일도,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끝내 십자가에 매달려 거꾸로 죽었던 베드로의 죽음도 이해가 갈만합니다. 그만큼 뜨겁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살았던 베드로의 삶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제목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싯구가 생각납니다. 베드로처럼 살아라 그러면 사실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만큼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예수님을 닮고 싶어서, 예수님 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때론 좌충우돌하고,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고 닮아가고 싶습니다. 맑은물가족이 베드로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살아내는 만큼 예수님을 더 깊이 온 몸과 삶으로 경험하고 알아가고 사랑하는 삶이길 바랍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가 울며 필요를 알릴 때마다 부모가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달래주는 일들을 통해 자신을 돌보는 부모의 존재를 깨닫고 경험합니다. 상황은 반복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아이를 안도감과 평온함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주신 이름은 “나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면 “나다, 너와 함께”입니다. 

풍랑 가운데 물위를 걸어서 오신 분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해라, 내다, 두려워말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 언제나 찾아오시며 함께하시는 분의 음성입니다. “내다”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과 때론 찾아오는 인생의 풍랑 가운데에서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깨고 찾아오셔서 “내다”라고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고 예배하는 맑은물이길 바랍니다. 

베드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베드로의 마음처럼 예수님을 알고, 닮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온 몸과 삶으로 예수님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함께 나눌 질문들

1. 최근 한 달, 열심히 노를 저었는데 제자리인 것 같았던 일이 있습니까? 그때 스스로를 자책하신 적이 있습니까?

2. 하나님이 내가 기대한 방식과 전혀 다르게 찾아오셨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는 못 알아보고 지나갔다가 나중에 알게 된 일도 좋습니다.

3. 이번 한 주, 하루 10분 홀로 물러나 있는 시간을 어디에 만들 수 있겠습니까?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하나씩 말해 봅시다.

 

 

 

 

https://youtu.be/rqyA6ZQIq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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