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이야기/함께 나누는 말씀

샛별목장 7/12 말씀 나눔

ioreusogo 님의 블로그 2026. 7. 25. 22:08

본문 : 마태복음 13:1-9, 18-23

오늘 마태복음 13장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9절에 이 비유가 말하는 씨는 하나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표현된 점을 미루어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말씀이 사람에게 도달했을 때 무슨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을 앞뒤로 살펴보면 12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악마화 하고, 기적을 요구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거부를 겪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게다가 13장 마지막에서는 고향사람들 또한 예수님을 배척하는 장면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앞뒤로 거부당하는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고, 그 한가운데에서 씨는 뿌려졌으나 많은 경우 열매 맺지 못한다는 비유가 놓여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땅이 올바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즉 예수님 자신이 겪고 있는 일과도 일치합니다.

그리고 13장의 나머지 비유들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는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이 볼품없고, 율법에서는 부정과 부패를 상징하는 누룩과도 같고, 심지어 가라지와 함께 자라니 가만 두어라는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 웅장함, 즉각성, 명확함으로 다가오지 않고, 작고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것 속에 숨겨져 있고, 인내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성 자체가 이미 거부를 초래하는 형태를 하고 있고, 그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 자신이 그 거부를 온몸으로 겪고 있으며, 그 거부당함이라는 사건 자체가 비유가 되어서 지금 우리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되돌아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를 두고하는 말씀이라는 씨가 곳곳에 뿌려졌을 때,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열매는 결실을 맺지 못하나, 좋은 밭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익숙한 비유이고 많이 들어온 말씀인데, 그래서 길가도, 돌밭도, 가시덤불도 무슨 마음밭인지 어렴풋이 안다고는 생각됩니다만, 문제는 마음밭이 좋아야 한다는 말은 참 많이 들어왔는데, 좋은 밭이 대체 무슨 마음가짐이냐..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는 점입니다.

그 힌트를, 비유가 끝난 직후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느냐” 고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서 부터 얻어, 생각을 정리하고, 묵상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사야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것이요…..(중략).....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완고함 때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완고한 마음, 돌같이 굳은 마음, 목이 곧아 뻣뻣함, 걍팍한 마음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특히, 나중에 한번더 설명 드리겠지만,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제2의 모세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 완고함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던 광야 세대를 의미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가 오늘 그 음성을 듣거든 므리바에서와 같이 … 너희 마음을 걍팍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고,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므리바는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흐르게 한 곳으로, 백성들이 목마르다 원망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묘사하는 네 가지 마음 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히 출애굽 광야세대의 마음의 어떠함을 나타낸다고 보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즉시 빼앗기고, 돌밭에 뿌려진 씨는 뿌리가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출애굽 백성들은 유월절을 포함한 10가지 재앙(기적)과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경험한 후, 단 사흘만에 물과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다녀서 다져진 땅에는 씨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것 같이 기적을 목격한 경험이 마음에 새겨지지 못하고 표면에서 튕겨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모세와 미리암은 격렬한 기쁨을 표현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기쁨을 지탱할 만큼 내면이 깊이 형성되지 못했기에 광야의 결핍이라는 환난속에서 그 얕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는 것이 지체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요구하며 황금 송아지 상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가장한 통제욕구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자기 손으로 만들고 관리할 수 있는 안전을 원하는 것, 자기가 자기 삶의 공급자이자 주관자가 되려는 것으로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로, 말씀을 받아 열매를 맺어야 할 그 순간에,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열매맺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으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완고함과 정확히 대비되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은 광야 세대 중에서도 실제로 가나안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자들로, 성경은 그들을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음이라”, 민수기32장)

광야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헤매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40년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적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보여준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내 삶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존재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판단하고 내가 쟁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물도, 양식도, 신적 임재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이 사십 년 내내 반복해서 드러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반복되는 배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십 년을 이렇게 총평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거만하고 목을 곧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십 년 동안 주께서 저희를 광야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니.”
모세 또한 이렇게 회고합니다. “너를 낮추며 시험하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낮춘다는 것은 단지 고생시킨다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 능력의 헛됨이 이렇게 반복해서 새겨질 때, 비로소 마음의 중심이 낮아지는것 같습니다. 광야는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곳,  자기 삶의 소유권이 근거 없음을 사십 년에 걸쳐 증명해 보인 곳이었습니다. 완고함의 실패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 두 가지가 반복되는 과정 자체가 밭을 갈아내는 과정이었고, 그렇게 갈아엎어진 자리에서 자라난 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낮은 마음, 곧 좋은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낮은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훗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부르신 그 이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가 아님을 굴욕이 아닌 안식으로 받아들인 마음, 더 이상 자기 것이라 주장할 것이 없어진 마음. 이것이 곧 심령의 가난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좋은 밭이 대체 무엇이냐는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광야가 이미 사십 년에 걸쳐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밭이란 곧 심령의 가난함, 가난한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좋은 밭에, 그 가난한 심령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이 됩니다.
이 질문앞에서 흔히 떠오르는 대답은, 기도를 더 많이 하자, 금식을 하든 금욕을 하자, 절제하자, 더 낮아지기로 결단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 무언가를 더 하거나, 무언가를 더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문제는 정말 그렇게 애쓴다고 내 마음이 낮아질까, 내 마음이 가난해질까 입니다. 오히려 애쓸수록 내가 이만큼 낮아지려고 노력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마음 한켠에 쌓이는건 아닌지.. 낮아지려는 노력 자체가, 여전히 내가 내 마음의 상태를 관리하고 성취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건 이미 가난한 심령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정말 마음이 가난해지기를 원하는걸까.. 가난한 심령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종교적인 언어로는 그것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결핍을 해결하고, 인생을 계획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애써 가난해지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방향이 어긋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심령은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하는 성취가 아니라, 광야세대가 40년 걸쳐 우리 대신 증명해 보인 것 처럼, 우리 힘으로는 만들어 낼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일까요..
앞서 살펴보았듯, 네 가지 마음 밭은 처음부터 광야 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기자가 광야 세대의 완고함을 두고 “본보기로 삼아 삼가라”(히브리서 3장)고 경고할 때, 이는 낯선 명령이 아니라 이 비유가 처음부터 겨냥해온 그 자리로 우리를 다시 데려다놓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기적의 표지들도 광야 세대를 바꾸지 못했고, 시내산의 율법 또한 이스라엘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완고함이 무엇인지 밖에서 규정하고 경고할 수는 있었지만, 그 완고함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규정만 하던 율법과 달리, 마음의 뿌리를 안에서부터 실제로 갈아엎으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그 일하심은, 우리가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내야 할 낮음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서 완수된 낮음을 지금 이리로 데려오는 일에 가깝습니다.
마태복음은 헤롯의 유아학살에서의 도피, 광야에서의 시험, 산에서 말씀선포 장면 등을 통해 예수님을 제2의 모세로 그려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백성을 이끌고 들어간 건 여호수아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이면서 동시에 참된 여호수아, 백성들을 더 온전한 안식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포를 몸소 완수하셨습니다. 광야 세대의 사십 년을 한 사람의 사십 일로 압축한 시험에서, 배고픔 앞에서 자기 필요를 자기 힘으로 확보하기를 거절하시고(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성전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시고, 천하만국의 제안의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광야 세대가 실패했던 그 지점을, 자기를 부인하는 낮은 마음으로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팔복이 지금 여기서 선언되는 이유는 이 완수된 것에 근거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광야 세대는 사십 년의 소진을 다 겪어야 비로소 가나안 문턱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팔복을 듣는 사람은 자기 소진의 완성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그 소진과 완성을 대신 통과한 이가 바로 앞에 서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인생을 돌아보면 광야 사십 일의 시험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십자가 재판에 잡혀 끌려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광야에서 거절했던 자기중심의 유혹들이 이제는 죽음을 거부하고 싶은 가장 극한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자기 뜻을 자기 손에 쥐지 않으십니다. 낮은 마음이 좋은 밭으로, 좋은 밭이 심령의 가난함으로 이어지는 이 길의 맨 끝, 자기 목숨의 주인 됨마저 내려놓으시는 자리까지 가십니다.
자기 부인의 이 물러남은 그저 한 번 일어나고 끝난 과거의 사건으로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밤 겟세마네의 기도가 완수한 것은 단지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말을 자기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것,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비운 그 물러남이 하나의 정보로 전달된 게 아니라 살아있는 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밤 한 사람이 완수한 자기 비움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같은 모양의 물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처음으로 그 길을 개척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 그 길 끝까지 걸어가서 완수해놓았고, 그 완수하심이 시간을 건너 지금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씨가 뿌려진다는 것은 결국 이것으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자기 비움이 과거의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내 마음밭에 실제로 도착해서, 오늘 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 살펴본 그 겨자씨와 누룩의 나라, 거부당하며 더디게 자라는 나라입니다. 자기중심을 내려놓은 자리에 서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 자신이 사셨던 것과 같은 모양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은, 이 거부당하는 나라의 방식 그대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완고함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광야 세대처럼, 우리도 오늘 채워지면 곧 잊어버리고, 목마르면 또다시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광야를 다 건너신 분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겟세마네에서 내려놓으신 그 뜻이, 성령을 통해 지금 내 마음 밭 가장 깊은 곳까지 이미 내려와 있습니다. 나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그 씨는 이미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할 일은 이 밭을 스스로 고쳐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그 씨를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내가 아니니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 안에 있는 두 가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원망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삶이 주어졌는지, 왜 나는 이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지 묻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자연스럽게 비교로 이어졌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수월해 보이는지,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 지금 돌아보면 이것은 광야 세대가 매일 반복했던 원망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채워지면 잊고, 목마르면 다시 하나님께 손가락질하는 그 패턴이 제 안에도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저는 어느 순간 이 말씀을 저 자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 작은 자라면, 나는 이미 할 만큼 하고 있다고. 나는 내 삶에 대해 떳떳하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내가 옳다는 것, 내가 이만큼 감당해왔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께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되새기면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제가 겪은 고통을 무기로 삼지 않는 것, 동시에 그 고통을 원망의 근거로도 삼지 않는 것인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삶이 주어졌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다 알아야만 견딜 수 있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말씀앞에서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삶의 질곡이라는 광야를 다 통과하신 분이 제 곁에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분은 저의 아픔과 고민과 절망에 함께 고난당하시는 분으로 지금도 살아가고 계십니다. 아니, 저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픔과 절망에 함꼐 고난당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제 고통은 저 혼자만의 괴로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 우주가, 이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분은 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고통 곁에 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제 고통을 다른 누구의 것과 견주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제가 아니어도, 저를 향한 그 마음만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안식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와 함께하심으로 제 마음을 낮추어가시는 그분의 손길을, 제 마음밭을 일궈가시는 열정을, 이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아니오니,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 씨앗 하나가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백 배의 결실을 맺어 자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