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는 출애굽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그 이후에 엘리야 선지자로 이어지는 그 기억의 계보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고, 이스라엘은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웠습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그려냅니다.
이 복음서 안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두번 나옵니다. 성인 남성기준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 그리고 그 두 사건 사이에 오늘 본문인 물위를 걷는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배치는,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신 것 처럼, 광야에서 무리를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것 처럼, 물위를 건너십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홀로 시내산에 오른것과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남겨두고 홀로 산에 오르십니다.
이 사건들속에서도 출애굽/모세와의 연관성을 이어나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8장에서도 비슷한 풍랑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지는가?” 라는 물음이 있었다면, 비슷한 이번 사건에서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비슷한 종류의 위기가 반복되는 사이, 물음에서 고백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뇌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우리의 뇌는 자연스럽게 비전보다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을 더 오래 기억하고, 지금 잘되고 있는 것보다 앞으로 잘못될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걱정합니다. 부정적인 경험에는 즉시 달라붙지만, 감사와 기쁨, 단순한 행복 같은 긍정적인 경험은 금세 흘려보내곤 합니다. 이미 주어진 것보다 잃어버릴수 있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 역시 그렇습니다. 직장에서의 상황, 특히 일이 잘 안풀리거나, 회사의 부정적인 전망들, 누군가의 뒷담화,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안타까운 이야기들, 그리고 앞으로 가족에게 일어날 부정적인 시나리오 등에 쉽게 마음을 사로잡힙니다. 반면 평범한 감사나 평안은 생각보다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성의 전통들은 이러한 경향을 단순히 뇌의 습관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과 타인과 세계로부터 분리된 존재라고 여기는 옛 사람, 혹은 자아의 오래된 습관과도 연결됩니다.
내가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공간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무엇이 위험한지,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먼저 살피게 됩니다. 사랑보다 생존이 우선이 되고, 감사보다 통제가 우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세상을 끊임없이 나누어 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안과 밖.
내 편인지 아닌지.
성공과 실패.
에덴동산 이야기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지식을 얻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바라보는 대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덴에서의 추방은 전체와의 연결감을 잃고 분리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 인간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홀로 올라간 동안, 산 아래 백성들은 불안 속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형상을 세워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것 같습니다.
금송아지는 단순한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어하는 인간의 불안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강한 풍랑 속에서 배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질곡을 어떻게든 잔잔하게 다스려보려는 마음, 좋은 밭 비유에서 말하는 재물에 대한 욕망도, 결국 이 불안을 다스려보려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배 안은 안전하고, 배 밖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풍랑위에 떠있는 배도 사실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경계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불안해 합니다.
바로 이 때에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십니다. 우리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풍랑속에서 말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며 놀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에게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특정한 이름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나다,너와함께있는자”,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기반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존재 그 자체 이십니다. 그러니 “나다” 라는 예수님의 이 말은 가벼운 인사치레라기 보다는 이 위기 가운데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계신 그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말입니다. (욥기에도 물위를 거니시는 분이 하나님 이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제자들은 단순히 기적을 본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계신 , 고난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만난 것입니다.
이 상황속에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배 밖으로 나갑니다. 잠시동안 그는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물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베드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현존을 잠시 경험하다가도, 물위를 걷듯 믿을수 없이 온전하고 충만한 순간을 누리다가도, 다시 풍랑을 바라봅니다.
감사보다는 불안을, 신뢰보다는 통제를,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주님이시거든” 이라는 조건을 달고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광야의 백성들이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광야 백성과는 다른 결, 다른 검증의 요구인듯합니다만..) 또한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출애굽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은 세례와도 같은 사건입니다. 바울의 해석을 따르면 그것은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의미에서 물에 잠겨 죽은 것과 같고, 예수께서 그를 건져 살리신 것은, 그 자신의 홍해를 건넌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물위를 걸어보려던 자에서, 건져 올려지는 자로, 상황을 통제하려던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자로 낮아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은 물 위를 걸었던 경험이 아니라, 물에 빠진 후 붙들린 경험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결국 자신을 붙드시는 손에 의해 살아간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한 순간 말입니다.
이 물에 빠짐은, 그저 넘어짐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걸으려던 옛 자아의 습관을 내려놓을수 있는 자리, 옛 사람이 죽는 자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서, 예수님께서 붙드시는 손으로 건져 올리십니다.
그러니 신뢰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실패가 우리를 더 깊이 그 현존 앞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어떠함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
결국 우리를 다시 그 현존 앞에 세우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이십니다.
베드로는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 고백을 스스로 배신하는 순간도 찾아오고 맙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합니다. 물속에 가라앉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 물으심으로써, 세번의 부인을 세번의 사랑 고백으로 되돌리게 하신 후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물위를 걷고, 빠지고, 다시 붙잡혀 끌어올려지는 그 패턴이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 되풀이 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사건은 계속 가라앉고 계속 붙잡히는 일이 되풀이 되면서, 그 반복 자체가 그를 빚어간다는 패턴의 시작이라고 봐도 될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일이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혼자 물에 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실패했고, 모두가 보는 가운데 붙들렸습니다. 공동체 앞에서 수치를 겪었고, 공동체 앞에서 낮아졌으며,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서로가 어떤 풍랑속에서 살아가는지, 그 풍랑을 어떻게 헤쳐가는지를 지켜보는 사이로 부름받았습니다. 때로 그 방식이 참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신뢰와는 별 상관없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때는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습, 깊어진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황에 부딪혔고, 물에 빠졌고, 건져올려졌습니다. 수치를 겪었고, 낮아졌고, 그럼에도 건져 올리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풍랑을 겪고 지켜보던 제자들도 그 현존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고백이 아직 온전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몇번이고 다시 흔들릴 고백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에 쉽게 이끌리고, 여전히 두려워하고 세상을 나누고 상황을 통제하려고 할 것입니다. 풍랑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의식적으로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을 붙들어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을 기억해야 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지만 더 크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힘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손이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빠졌으나 버려지지 않았고,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으나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전체는 계속 가라앉고 계속 붙잡히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신것 처럼, 모세가 홀로 하나님을 만나 말씀을 받은 것 처럼, 우리의 부정성과 옛 자아에 함몰되지 않도록, 우리도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패턴입니다.
우리는 계속 물에 빠질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붙드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그 현존 앞으로 이끄십니다.
그 붙드시는 손길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는 사실, 삶의 경험들 속에서 그 신뢰를 쌓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정적인 전망들, 경계를 짓고, 나의 생존을 위해 애쓰는 마음들이..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말아라
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손길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 일들에 대한 소망과, 죽음조차 뗴어낼수 없는 그 사랑으로 변화하길 바랍니다. 바울은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진정으로 그 충만함으로, 그 현존의 가득함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가길 바랍니다.